아리우스주의 논쟁과 성 치릴로의 역할 – 정통 신앙을 수호한 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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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우스주의 논쟁과 성 치릴로의 역할 – 정통 신앙을 수호한 교부

성 치릴로 가톨릭

 

서론: 신학적 논쟁 속의 신앙 수호자

기독교 역사에서 신학적 논쟁은 신앙의 핵심을 명확히 하는 중요한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이러한 논쟁은 교회의 분열과 신자들 간의 갈등을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4세기, 초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과 신성을 둘러싼 거대한 신학적 논쟁에 휩싸였습니다. 그 중심에는 ‘아리우스주의(Arianism)’라는 이단이 있었고, 이 논쟁은 교회의 근간을 뒤흔들었습니다.

성 치릴로(Cyrillus)는 이러한 혼란 속에서 예루살렘의 주교로서 정통 신앙을 수호하고, 아리우스주의에 맞서 싸웠습니다. 그는 단순히 논쟁을 벌인 것이 아니라, 신자들에게 올바른 교리를 가르치고, 니케아 신경을 옹호하며 초대 교회의 신학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아리우스주의가 무엇인지, 성 치릴로가 이를 어떻게 반박했는지, 그리고 그의 활동이 교회사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겠습니다.


1. 아리우스주의란 무엇인가?

아리우스주의는 4세기 초반, 알렉산드리아의 사제 **아리우스(Arius, 256~336년)**가 주장한 신학적 견해에서 비롯되었다. 이 사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고,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다르게 해석하면서 교회의 커다란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1) 아리우스주의의 핵심 교리

아리우스는 **"성자는 성부에 의해 창조된 존재이며, 따라서 성부와 동일한 본질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의 사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교리적 주장 아리우스주의의 입장 정통 기독교 교리(니케아 신경)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 성부와 다름 (피조물) 성부와 동일한 본질 (호모우시오스, Homoousios)
예수의 창조 여부 성부가 창조한 피조물 창조되지 않은 영원한 존재
성부와 성자의 관계 성부가 성자를 창조 성자는 영원히 성부와 함께 존재
성령의 위치 성자는 성령보다 높은 존재 삼위일체의 일부

아리우스는 특히 "한때 예수는 존재하지 않았다."(ἦν ποτε ὅτε οὐκ ἦν, En pote hote ouk en)는 표현을 사용하며, 예수 그리스도가 성부에 의해 시간 속에서 창조된 존재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기존의 삼위일체 교리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내용이었습니다.


2. 아리우스주의와 니케아 공의회(325년)

아리우스주의가 알렉산드리아에서 논란을 일으키자,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였던 **성 알렉산더(St. Alexander)**는 이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아리우스의 사상은 빠르게 확산되었고, 교회 내 분열을 초래했습니다.

이에 325년, **콘스탄티누스 황제(Constantine I)**는 기독교 내부의 분열을 해결하기 위해 **니케아 공의회(First Council of Nicaea)**를 소집했습니다.

1) 니케아 공의회의 주요 결정

  • 아리우스주의는 **이단(Heresy)**으로 규정되었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가진 존재(Homoousios, ὁμοούσιος)**로 선언되었습니다.
  • 니케아 신경(Nicene Creed)이 작성되어, 정통 기독교 신앙을 공식적으로 확립했습니다.

니케아 신경의 핵심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나이다...
또한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나이다.
그분은 성부에게서 나신 독생자시오,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지니신 분이시며,
창조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시니라."

이렇게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아리우스주의는 공식적으로 배척되었지만, 논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후에도 아리우스주의를 지지하는 세력이 강력하게 저항하며 계속해서 논쟁이 이어졌습니다.


3. 성 치릴로의 역할: 신앙의 수호자로서의 삶

성 치릴로는 350년경 예루살렘 주교로 임명되었을 때, 이미 아리우스주의 논쟁이 교회 내에서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1) 예루살렘 주교로서의 정통 신앙 수호

  • 성 치릴로는 니케아 신경을 강력히 옹호하며, 예수가 성부와 동등한 존재임을 강조했습니다.
  • 그는 예비신자 교육에서 **"그리스도는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지닌 분이시다."**라고 가르쳤습니다.
  • 그의 저서 *교리교육 강의(Catechetical Lectures)*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명확히 설명하며 신자들에게 올바른 신앙을 전수했습니다.

2) 유배와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다

  • 아리우스주의를 지지하던 가이사레아의 아카키우스(Acacius) 주교는 성 치릴로를 반대했고, 결국 그는 유배를 당하게 됩니다.
  • 그러나 359년 셀레우키아 공의회에서 복권되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 하지만 이후에도 박해를 받아 세 차례나 유배를 당했고, 367년에야 완전히 복권되었습니다.

3)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381년)와 삼위일체 신앙 확립

  • 성 치릴로는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First Council of Constantinople)**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 이 공의회에서는 니케아 신경이 재확인되었으며, 삼위일체 교리가 확정되었습니다.
  • 이로 인해 아리우스주의는 완전히 몰락하였고, 교회는 정통 신앙을 확립할 수 있었습니다.

결론: 신앙을 위한 끊임없는 투쟁

아리우스주의 논쟁은 단순한 신학적 논쟁이 아니라, 신앙의 핵심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습니다. 성 치릴로는 예루살렘 주교로서 신앙의 순수성을 수호하는 데 헌신하였으며, 그의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가톨릭 교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는 박해와 유배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며, 삼위일체 교리를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위대한 신앙의 수호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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