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한 자에서 하느님의 친구로, 성 남명혁 다미아노 – 숨은 성인의 위대한 순교 이야기

반응형

 

천한 자에서 하느님의 친구로, 성 남명혁 다미아노 – 숨은 성인의 위대한 순교 이야기

전통 한복을 입고 십자가 목걸이를 들고 있는 성 남명혁 다미아노 성인의 성화 이미지
성 남명혁 다미아노

1. 양반의 피를 타고났지만, 방황으로 시작된 삶

성 남명혁 다미아노(聖 南命赫 다미아노스, Damianos)는 겉으로는 양반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젊은 시절은 조선 후기의 혼란한 사회상과 마찬가지로 불안정하고, 방탕함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술과 친구에 빠져 무질서한 생활을 이어갔고, 거리의 사람들과 어울리며 하루하루를 의미 없이 소비했습니다. 가족과 이웃,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조차 실망을 안기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섭리는 사람의 잣대와 달랐습니다. 세상은 그를 망가진 청년으로 보았지만, 하느님은 그 안에 감추어진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2. 회심 – 거리의 청년에서 이웃의 피난처로

30세 무렵, 남명혁은 뜻밖의 계기로 천주교를 접하게 됩니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 천주교는 ‘서양의 사악한 종교’로 낙인찍혀 박해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는 그 안에서 참된 빛과 구원의 진리를 발견했습니다. 처음엔 단순한 호기심이었지만, 점차 교리를 배우며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마침내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신부 의 손에 세례를 받으며 다미아노라는 이름을 갖게 됩니다.

그의 삶은 그날 이후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전의 방탕했던 모습은 자취를 감추고, 오히려 거리의 친구들을 복음으로 이끄는 일에 전념했습니다. 사람들을 도우며, 가난한 외교인과 천주교 신자들에게 자신의 집을 열어주었습니다. 그의 집은 점차 비밀 신앙 공동체의 피난처로 알려지게 되었고, 많은 신자들이 그를 ‘하느님의 친구’라 불렀습니다.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수배 중인 외국인 신부에게 식사를 전해주었으며, 도망 중인 신자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했습니다. 배고픈 아이들을 위해 밥을 지어주고, 옷을 벗어주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누구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그는 매일을 살았습니다.

 


3. “성교회의 남 다미아노”가 되고 싶었던 사람

사람들이 그의 개종을 의아해하며 이름의 의미를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저 세상에서 저의 이름을 우러러 부를 것인가? 철포를 위하여 순교한 성교회의 남 다미아노처럼 불려진다면 얼마나 영광이겠느냐.”

그의 말은 단순한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순교를 향한 사무치는 갈망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생명을 바칠 각오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다짐은 곧 현실이 됩니다.

1839년, 조선의 천주교회에 혹독한 박해가 몰아치던 병오박해 시기. 그해 4월 7일, 다미아노는 아우구스티노 회장(배교자)의 밀고로 인해 밤중에 체포됩니다. 체포 당시, 그의 집에는 146명의 신자들이 모여 예비 신자 교육과 미사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미 경찰이 들이닥칠 것을 알고 있었지만, 도망치지 않고 남아 신자들의 탈출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홀로 잡혀갔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 조정에서도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의 집에서 발견된 미사도구, 성상, 외국 서적은 천주교의 실체를 증명하는 물증으로 여겨졌고, 이는 그에게 더욱 가혹한 형벌로 이어졌습니다.

 


4. 차디찬 형틀과 불에 달군 쇠사슬 속에서도

다미아노가 체포된 후, 그에게 가해진 고문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의금부에서는 그의 죄목을 “서양 종교의 교리를 받아들여, 외국 신부들과 밀접하게 교류하고 신자들을 숨겨준 죄”라 하였습니다.

그는 불에 달군 쇠로 무릎을 찌르고, 뼈가 으스러질 정도의 곤장을 맞으면서도 결코 신앙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관헌은 그의 고백을 받아내기 위해 거듭해서 유혹과 협박을 반복했습니다. “입으로만 배반하면 살려주겠다”, “네 가족을 위해 회유해라”라고 속삭였지만, 그의 입은 단호했습니다.

“외국 교회를 배반하고 내 입신양명을 도모하라 하신다면, 저는 이 종교를 공공연히 믿으며 이미 8년 전부터 배반할 생각을 털끝만큼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고문을 하던 관리조차 고개를 떨구며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교육을 못 받은 이다만, 그들의 집을 탐한 적 없고, 천주교 믿던 중에 남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는 교리에 감히 이견을 낼 수가 없다.”

다미아노의 신앙은 관리들의 양심마저 흔들 정도로 강건했습니다.

 


5. 고통 속에서 피어난 거룩함 – 순교와 시복

마침내, 1839년 4월 21일. 다미아노는 새벽녘 형장으로 끌려갑니다. 이 날은 순교자들이 떼로 처형되던 비극적인 날이었습니다. 그는 맨 먼저 끌려나와 대기하고 있다가, 마지막까지 형을 받게 됩니다. 순서가 다가오자 그의 발을 묶고 몸을 메달아 놓고는, 군사들이 돌로 내려칩니다. 그의 육신은 뭉개지고 꺾였지만, 그의 눈빛은 죽는 순간까지도 담담하고 평화로웠습니다.

그를 지켜보던 이들 중 몇몇은 후일 증언합니다.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천사가 내려와 그를 데려가는 듯했습니다.”

그의 시신은 그날 밤 몰래 옮겨져 신자들에 의해 매장되었고, 몇 년 뒤 그의 순교는 교황청에 보고됩니다.

1901년, 교황 레오 13세는 그를 포함한 병오박해 순교자들을 시복하며 그의 믿음을 공적으로 인정하였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여의도 광장에서 거행된 대규모 미사에서 그를 성인으로 시성합니다.

 


6. 결론 –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성 남명혁 다미아노 성인은 학자도, 사제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방황하던 한 청년이었고, 무명의 이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함으로써 하느님의 도구가 되었고, 결국엔 순교로 하늘의 영광에 들어갔습니다.

그의 삶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누구나 성인의 길을 갈 수 있다.”

우리가 오늘 성 남명혁 다미아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가 순교했기 때문이 아니라, 온전히 하느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사람이 특별해지는 길은 하느님의 뜻에 응답하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성남명혁다미아노 #103위순교성인 #병오박해 #조선천주교박해사 #천주교성인전기 #한국가톨릭순교자 #회개의성인 #신앙의모범 #순교의길 #서울순교자 #한국교회사 #티스토리성인스토리 #조선의성인들 #가톨릭블로그 #성인전기추천 #천주교회개인물 #성인의삶 #성인들의이야기 #하느님의친구 #티스토리블로그 #성인시성기념일 #서울성지 #조선천주교회 #신앙을지킨사람들 #가톨릭이야기 #성인전공유 #성인전나눔 #믿음의여정 #다미아노성인 #기억할성인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