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인박해의 피로 물든 선교사의 길 – 성 도리 헨리코 신부의 삶과 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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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박해의 피로 물든 선교사의 길 – 성 도리 헨리코 신부의 삶과 순교

성 도리 헨리코 신부가 검은 사제복과 붉은 스톨을 입고 십자가를 들고 있는 전통적인 가톨릭 성화 이미지
조선에서 순교한 프랑스 선교사, 성 도리 헨리코 신부

1. 프랑스 농가에서 자란 한 소년, 조선을 향한 소명을 품다

1839년 9월 23일, 프랑스 서부 루쏭 교구 소속 생틸레르 드 탈몽(Saint-Hilaire-de-Talmont)이라는 조용한 마을에서 한 남자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는 바로 훗날 조선 땅에서 순교의 피를 흘리게 될 성 도리 헨리코 신부(Pierre Henri Dorie, 한국 세례명 김 헨리코)입니다. 부모는 신앙심 깊은 농부로서 어렵고 가난한 형편 속에서도 자녀에게 신앙 교육과 성실한 삶을 가르쳤습니다. 소년 도리는 건강하고 성실하며 경건한 아이였고, 지역 보좌신부의 눈에 띄어 성직자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1852년 10월, 그는 프랑스 소신학교에 입학하여 8년 동안 공부했고, 이어 1860년 루쏭 교구의 대신학교로 진학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건강은 학업에 큰 걸림돌이 되었고, 그는 중도에 학업을 중단하게 됩니다. 이때 그는 부모와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합니다. 부모는 아들의 건강과 먼 이국땅에서의 선교 위험을 걱정했지만, 그는 “저는 외국 선교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저에게 있어 진실로 불가능한 일입니다”라고 말하며 강한 소명을 고백했습니다.

 


2. 먼 여정의 시작 – 파리에서 조선까지

1864년 5월 21일, 도리 헨리코는 성 랑페르 드 브르토네르 유스토, 성 릴리의 루도비코, 성 위앵 루카 등과 함께 사제 서품을 받고 조선 선교사로 임명됩니다. 7월 15일 파리를 떠난 그는 마르세유 항에서 배를 타고 동방으로 향했으며, 9월 경 홍콩을 거쳐 상해에 도착했습니다. 당시 조선은 병인박해 전야로 외국인 선교사 입국이 극도로 위험한 시기였고, 선교사들은 상해에서 대기하며 입국 기회를 엿봐야 했습니다.

도리 신부는 1865년 4월 17일, 백동호 인근 해안에서 조선으로 밀입국에 성공합니다. 이후 경기도 용인 손골로 이동해 은신하며 조선어를 배우고, 선배 선교사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불과 1년 뒤, 1866년 병인박해가 시작되면서 조선 전역은 피바람에 휩싸입니다. 당시 흥선대원군은 프랑스 함대의 위협을 의식해 외국 선교사들을 색출하고 천주교 박해를 명령했고, 도리 헨리코 신부 역시 표적이 되었습니다.

 


3. 젊은 선교사의 장엄한 죽음 – 서소문 밖에서 흘린 순교의 피

1866년 3월 27일, 도리 헨리코 신부는 서북 교우촌에서 조선 관헌에 체포됩니다. 그는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을 선고받았고, 3월 7일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그의 나이 불과 27세였습니다.

처형 직전, 그는 조정 관리들이 본국 송환을 권유하자, 단호히 거절하며 “이 나라에 머무는 동안 많은 이들이 죽었으니, 죽으면 죽었지 돌아가지 않겠다”는 신앙고백을 남겼습니다. 이는 도리 헨리코 신부가 단순한 외국 선교사가 아니라 조선을 사랑하고 이 땅에서 죽기를 각오한 복음의 증인이었음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도리 신부의 시신은 5월 12일 교우들에 의해 수습되어 한강로에 안장되었고, 이후 명동 성당 성직자 묘역으로 이장되었습니다. 그의 순교는 조선 천주교회에 깊은 감동과 믿음의 씨앗을 심었으며, 교회사 속에 길이 남을 숭고한 신앙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4. 교회가 인정한 순교 – 성인의 반열에 오르다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는 도리 헨리코 신부를 “병인박해 순교자 24위” 중 한 명으로 시복하였습니다. 이후 1984년 5월 6일,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거행된 시성식에서 그를 포함한 한국 103위 순교자를 정식으로 성인 반열에 올렸습니다. 교황은 이날 “한국 천주교회는 순교자들의 피 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라고 선언하며, 순교자들의 신앙과 충성을 높이 찬양했습니다.

도리 헨리코 신부의 이름은 로마 교회의 공식 순교자 목록인 《로마 순교록》에도 등재되어 있으며, 그의 축일은 3월 7일로 지정되어 매년 기념되고 있습니다. 특히 성인의 순교 장면은 서울 성지 순례길의 한 코스로 구성되어 많은 신자들이 그의 묘역을 참배하고 기도하며 신앙을 새롭게 다짐하고 있습니다.

도리 헨리코 신부의 시신은 순교 직후 형장에 방치되어 있다가, 두 달 뒤인 1866년 5월 12일 박순지 요한 등의 교우들에 의해 수습되어 잠시 인근의 웅거모래터에 안장되었습니다. 이후 5월 27일, 시신은 용산구 한강로3가로 옮겨져 안치되었고, 1899년 10월 30일에는 용산의 예수성심신학교로 이장되었습니다. 그 후 1900년 9월 5일 명동 성당 지하실로 다시 옮겨졌으며, 1967년 병인박해 100주년을 기념하여 조성된 절두산 순교성지의 유해실로 최종 이장되어 오늘날까지 그곳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 도리 헨리코 신부 정보 요약

  • 세례명: 베드로 (Petrus)
  • 한국명: 김 헨리코
  • 출생: 1839년 9월 23일, 프랑스 생틸레르 드 탈몽
  • 사망: 1866년 3월 7일, 서울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
  • 시복: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
  • 시성: 1984년 5월 6일, 성 요한 바오로 2세
  • 축일: 3월 7일
  • 장지: 절두산 순교성지의 유해실

맺음말 – 순교는 끝이 아닌 시작입니다

성 도리 헨리코 신부의 짧지만 불꽃 같았던 삶은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신앙의 질문을 던집니다. 그는 고난과 두려움 앞에서도 “끝까지 이 땅에 남겠다”고 말하며 자신의 생명을 봉헌했습니다. 복음의 씨앗은 그의 피 위에서 자라났고, 지금도 수많은 신자들에게 감동과 힘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위대한 순교자를 기억하며, 그가 걸었던 믿음의 길을 오늘 우리 삶에서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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