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숨은 지도자, 성 김성우 안토니오 – 피로 새긴 신앙의 족적
1. 구산골, 그 평범한 마을의 비범한 사나이
경기도 광주, 조선 후기의 작은 마을 구산. 언뜻 평범해 보이는 이 마을의 한 가문에서 훗날 교회사를 뒤흔들 인물이 태어났습니다. 이름은 김성우, 세례명은 안토니오. 부유하고 평화로운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남다른 인품과 유덕으로 이미 어린 시절부터 ‘동네 어른들의 자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특별하게 만든 것은 인품만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부드러운 힘, 곧 ‘신앙’이 있었습니다.
성 김성우 안토니오는 세 형제 중 둘째였습니다. 성격은 온화했고, 외교인들조차 그를 흠모할 정도로 넉넉한 품을 지녔습니다. 형제들은 어느 날, 조선 땅에 들어온 ‘천주교’라는 새로운 진리에 대해 듣게 됩니다. 이야기만 들었을 뿐인데 마음이 뒤흔들렸고, 셋 중 두 명은 즉시 입교, 머지않아 셋째까지 모두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들의 신앙은 마을 사람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김성우 형제가 믿는 종교라면 뭔가 있겠지”라며 하나 둘 교리에 귀를 기울였고, 조용하던 구산골은 이내 열정적인 교우촌으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그렇게 시작된 평신도 지도자의 길, 그 중심에 안토니오가 서 있었습니다.
2. 신부를 숨긴 남자, 목숨을 건 서울 이주
세월이 흘러, 김성우의 삶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그는 중대한 결심을 합니다. 성사를 자주 받을 수 없는 시골에서 벗어나 신부와 함께할 수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는 결심이었습니다.
그는 가족을 이끌고 서울로 이주합니다. 처음 정착한 곳은 느리골(현 효제동), 이후에는 **마장안(현 마장동)**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자신의 집을 강당으로 개조, 비밀리에 성사를 집전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하고, 파치피코 유방제(劉方濟) 신부를 직접 모시며 여름 동안 보호합니다.
당시 회장이었던 그는 단순한 안내자가 아닌, 지하교회의 실질적인 방패막이였습니다. 감시의 눈을 피해 신부를 숨기고, 신자들에게 성사를 베풀 수 있도록 도운 그의 집은 조선 교회의 ‘은신처’이자 ‘희망의 집’이었습니다.
3. 형제들의 순교, 이어지는 시련
그러나 안토니오의 헌신은 끝없는 시련과 함께했습니다. 1841년, 박해의 소용돌이가 몰아치던 어느 날, 고향에 남아있던 형 김만집 아우구스티누스가 체포되어 1월 28일 옥사합니다. 동생 김문집 베드로 역시 옥살이 중이었습니다. 형제들이 차례로 잡혀가고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을 지켜본다는 것, 이는 안토니오에게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습니다.
게다가 개인적으로도 큰 아픔이 찾아옵니다. 아내의 죽음. 사랑하던 아내마저 하늘로 떠나보낸 그는 한동안 고통 속에 살았지만, 끝내 슬픔을 이겨내고 재혼을 통해 다시 가정을 일구고자 합니다. 하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1840년 1월경, 배교자가 밀고하면서 안토니오 역시 포졸의 표적이 됩니다.
그는 가족과 함께 지방으로 도피, 외진 곳에서 숨어 살며 긴장 속의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무더운 여름, 눈보라 치는 겨울도 동굴 속이나 초가에 몸을 숨긴 채 보냈습니다. 그러나 끝내 은신처는 발각되었고, 그는 가족과 함께 포도청으로 끌려가는 참혹한 결말을 맞이합니다.
4. 마지막 시험대, 회유와 고문 속에서도 굳건한 신앙
포도청에서 그는 혹독한 고문을 받습니다. “지금이라도 신앙을 버리면 살려주겠다.” 회유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관리들은 그가 마을의 존경받는 인물이자, 평소 충직하고 예의 바른 성품임을 잘 알았기에 배교만 하면 목숨을 살릴 수 있도록 배려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단호했습니다.
“하느님은 나의 생명이요, 나의 길이요, 나의 진리이십니다. 나는 이 신앙을 버릴 수 없습니다.”
그 말에 더 이상 회유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관리들은 “저 자는 끝까지 물러서지 않겠군”이라며 탄복했다고도 합니다. 결국 그는 참수형을 선고받고, 하늘나라로 순교의 영광을 안고 나아갑니다.
5. 후손에게 남긴 유산 – 김성우 안토니오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
그의 축일은 매년 9월 20일, 한국 천주교회는 이날 103위 성인을 함께 기립니다. 그러나 성 김성우 안토니오가 오늘날 우리에게 남긴 것은 단순한 기념일이 아닙니다.
그는 말합니다.
“믿음은 말이 아니라 삶이다.”
그의 삶은 침묵 속에서도 복음을 외쳤고, 피로 신앙을 증거했습니다.
그는 사제가 아니었습니다. 수도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정에서, 마을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가장 강력한 리더였으며, 숨은 영웅이었습니다.
마치며 – 우리의 일상에서 김성우 안토니오처럼
성 김성우 안토니오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우리도 때때로 믿음을 숨기고 싶은 유혹 앞에 서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말합니다. “신앙은 보호받기보다 증거되어야 한다”고.
이제 우리도 묻습니다.
“나는 오늘 무엇으로 신앙을 증거하고 있는가?”
그의 삶은 말없이 우리에게 대답을 건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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